우리집 아이들은 집에서 악기 연주하는 것을 좋아한다. 남자아이만 셋이라 아무리 단속해도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고 아이들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라야한다는 우리 부부의 생각탓에 일찌감치 아파트 생활은 접고 주택에서 살다보니 크게 소음을 신경쓰지 않고 본인들이 하고 싶은대로 하고 지내는 편이다. 피아노, 오카리나, 리코더, 우쿨렐레, 하모니카, 칼림바 등등. 각각 정식으로 배운 것도 있지만 한 명이 연주하면 옆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이 제법 들을만하다.
지금은 둘째가 한창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재미에 빠져있다. 둘째는 학원에서 그날 배운 곡을 외워서 집에 오면 치곤하는데 내 아이라서가 아니라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암보(暗譜-악보를 외워서 기억함)능력이 좋은 편이라고 한다. 특별한 재능이 있다기보다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라 더 그런 것 같다.
하루는 둘째가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곡이 생겼다고 치는데 그 곡이 바로 김동규 님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였다.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10월은 십월이라고 발음하니 시월이라고 발음하니?”
첫째와 둘째는 이미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익숙하여 “시월”이라고 답하였고, 아직 미취학인 셋째는 “숫자가 십이니 십월이 아닌가요? 그런데 시월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라고 헷갈려하였다.
그래서 다시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다.
“한국어에서 발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받침이 바뀌는 경우가 있어. 많이 말하면 기억하기 어려우니까 그때그때 또 이야기 나오면 찾아보도록 하자. 오늘은 다른 경우는 얘기하지 말고 숫자만 얘기할게. 먼저 달력을 볼까? 일월부터 십이월이 있지?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 십일, 십이, 월이 붙으면 어떻게 될까? 받침에 있던 자음이 ‘월’의 ‘o’자리로 옮겨가서 소리가 나겠지? 이뤌, 이월, 사뭘, 사월,…. 다른건 괜찮은데 ‘육’ 볼까? ‘유궐’ 발음이 좀 불편하다고 느껴져. 그래서 받침 ‘ㄱ’을 없애고 ‘유월’이라고 발음했을 때 같은 소리나는 게 있나 주변을 보니 없어. 아! 그럼 없애고 발음해도 안 헷갈리니 없애고 발음하자~ 또 쭉 발음해. 치뤌, 파뤌, 구월. ‘십’은 어때? ‘십월’. 어? 또 좀 힘든데? 이번에도 ‘ㅂ’을 없애볼까? ‘시월’. 편안해. 같은 소리 나는거 있나요? 없어. 좋아. 그럼 ‘시월’로 발음합시다. 이렇게 발음하기 편하게 바뀐거야.”
“그럼 ‘일’도 같은거 아니에요? 왜 ‘일’에는 ‘유일’, ‘시일’이 아니고 ‘유길’, ‘시빌’ 그대로 있어요?”
“‘월’은 ‘우’랑 ‘어’랑 모음이 2개가 더해진 모양이지. 벌써 자음+모음이 2개가 더해져있고 받침까지 있어서 뚱뚱한데 거기다가 앞 글자의 받침까지 또 가져와서 더 받을데가 없었어. 그래서 앞의 받침은 거절합니다. 한거야. ‘ㄹ’은 자음 중에서도 좀 날씬한 친구라서 그래도 받아주는데 ‘ㄹ’말고 다른 자음은 ‘월’에서는 더 못 받아준대. 그래서 ‘월’에서는 안되는거야. 하지만 ‘일’은 모음이 1개라서 앞의 받침을 받아올 수 있어.”
외국인에게 사회통합프로그램 한국어와 한국문화 초급1단계 교재를 수업할 때 5단원에서 날짜 표현이 나온다. 거기서 6월과 10월의 발음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게 되는데 나는 그 부분에서 수업 자료로 바로 이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노래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 노래의 제목 이야기를 하며 ‘시월’이라는 발음에 흥미를 갖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한다. 초급 단계에서는 흥미 유도와 이렇게 발음이 된다는 것에 대한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
물론 국어학이나 언어학 전공으로 들어가면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이 현상을 발음이 원래와 다른 형태로 바뀌는 것을 ‘활음조(滑音調)’라고 한다. 영어로는 유포니(euphony)라고 하는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편하게 말하고 들을 수 있게 소리가 매끄럽게 변화하는 현상이다. 모과(木瓜-목과>모과), 할아버지(한아버지>할아버지), an apple에서의 a대신 an이 쓰이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나 가끔 한국어 수업을 하는 상황에서나 교재 외의 언어 문법 지식과 여러 가지 상식들을 지나가듯 가볍게 끄집어내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꼭 지금 공부하며 기억할 필요는 없지만 들어두면 다음에 어디선가 스쳐가듯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하주은 multiculturekorea.hje@gmail.com